당신의 자녀를 성적에 따라서 대학에 보내면 안되는 이유

by 노벨레테 · 202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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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자녀가 공부를 더 잘하고, 또 좋은 대학에 가기를 원합니다. 사회가 그렇게 구조화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학력 사회

우리 나라는 학력사회 입니다. 여전히 학력은 우리 나라 안에서라면 명함 처럼 따라다니곤 합니다.

명문대에 가야 하는 것은 인생을 좀더 성공적으로 살기 위한 ‘정답’입니다. 명문대를 가야하는가?에 대해 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만큼의 경쟁 사회이기도 합니다. 한정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에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른 싸움을 우리나라에서는 10대의 입시때부터 경험합니다.

대학 입학, 입시는 10대를 갉아먹는 커다란 관문입니다. 10대에는 마치 인생이 걸린 목표처럼 보일 때도 많습니다. 고3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가지는 무게가 있습니다. 수험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고3을 서포트하는 고충도 있습니다.

강남과 서울

강남은 땅값이 높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강남에는 8학군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요 학원도 즐비합니다.
우리나라는 서울에 편향되어 발전된 나라입니다. 시골과 도시의 격차가 심하고 시골이 낙후된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삶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시골이 충분히 아름답고 선호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과는 다릅니다. 당연히 서울이 지방보다 훨씬 땅값이 비쌉니다. 그리고 서울에 소위 말하는 명문 대학이 모여있습니다. 카이스트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명문 대학은 서울에 있습니다.
그래서 수험가 용어로 “인서울”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습니다. 경쟁으로 인해서 결국은 수험 점수에 따라서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 정해지는데 서울권 대학을 들어가는 커트라인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심지어 옆나라 일본 조차도 모든 명문 대학이 도쿄에 밀집해있지는 않습니다. 지방의 일본의 국립 대학들도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10대때부터 성공의 지표를 정해놓습니다. 최고가 무엇인지 정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속하느냐 아니냐로 그 사람을 분류합니다. 사회적인 욕구나 선망이 비슷한 위치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이 틀을 비틀어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울, 강남, 아파트, 서울대, 대기업, 외제차, 명품백 등을 들었을때 그것이 “별로라고” 말하는 것이 기이하고 이상하게 들릴 정도입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으로 이미 ‘정해져’있고, 요는 그것을 어떻게 얻을까, 얻을 수 있을까 혹은 없을까 등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지 때문입니다.
달을 향해 가는 방법에 관심이 있지 아무도 그 달 자체에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고민해보지 않습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그 달에 가지조차 못하기 때문에 그저 스스로의 능력 부족을 자조할 뿐입니다.

이름있는 직업

직업으로 말하자면 변호사, 의사, 약사, 검사, 판사, 교수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공무원이나 교사 등도 있습니다. 혹은 대기업 입사도 있겠습니다. 대학 입시의 학과별 커트라인도 철저하게 저 중심으로 재배열이 됩니다. 그래서 이과의 경우는 인서울 대학의 선호도 이전에 의대 커트라인은 다른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역시 이런 직업들을 일부러 ‘하지 말라고’한다거나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말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에 비하면 비주류 학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철학이 그렇습니다. 인문대 전반도 사정은 안좋습니다. 점점 자본과 취업에 의해서 대학 학과가 재배치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에서부터인가 한국에 스펙이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이제 대학에서도 고등학교 때 이상으로 경쟁을 하거나 요구되는 뭔가를 달성하고자 합니다.
학점, 어학연수, 공모전, 인턴, 어학실력 등으로 구성된 스펙이라는 표에서 개개인은 상품화가 됩니다. 다시 가치의 줄세우기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이 “이미 정해진 정답의 줄세우기”에는 개인의 개성이 끼어들지 않습니다. 개개인의 취향도 고려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양성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지워져있습니다.

개인의 성향과 마음

우리 나라에서 누군가가 “철학과가 의대보다 좋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이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커트라인이 높은 의대는 어느 학과보다 좋은 과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대가 철학과 보다 좋다.”라는 반대의 경우를 말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너무 명백한 사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더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여기서 ‘좋다’라는 말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더 인정을 받는 과이다, 과를 나와서 기대 수입이 높을 수 있다, 직업이 보장되기가 더 쉽다. 그런 말들을 내포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학문으로서의 매력이나 그 학문을 하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 보람, 희열, 기쁨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 자체를 직접 겪으면서 사람들이 느끼게되는 감정이나 경험에서 오는 만족감, 행복 같은 것들 말입니다. 정말 철학을 의학보다 ‘좋아할 수 있는’ 감정, 그것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그 감정 설 자리가 저 문장을 기이하게 여기는 사회에서는 긿을 잃게 됩니다. 어떤 학문에 더 매력을 느끼고 그것에 끌리고 그것을 하면서 마음의 행복과 보람을 느끼고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향, 그리고 또 성장과정 속에서 겪은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혼의 울림은 무시해도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무언가 내면의 목표를 가지고 세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거기에 근접한 경험을 할때 신호를 줍니다. 마음 두근거림, 벅차오름, 그런 직접적이고 강렬한 경험으로 신호를 계속 보냅니다. 그리고 마음은 때로는 반대의 신호를 보내기도 합니다. 괴로움, 고통,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은 느낌, 숨이 안 쉬어지는 것 같은 느낌, 눈물 등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신호를 간과하면 마음의 병이 되어 드러납니다. 마음이 더 큰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저 마음의 신호가 줄세우기 식으로 이미 사회에서 너무나 확고하게 정해져있는 저 순서를 따르지 않는 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나 다양하고 그 고유의 개성과 취향 그리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사명과 일치하거나 유사한 일을 할 수 있을때 사람은 가장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숨을 쉬는 것을 느끼고 기쁨을 느낍니다. 이는 거의 즉각적인 생생한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러란 깊은 내면의 기쁨은 단순히 의대에 합격하거나, 강남에 집을 사거나, 외제차를 사거나, 대기업에 입사해서 느끼는 기쁨과는 다릅니다. 외부적인 가치 체계가 아닌 내면의 가치와 일렬이 되어서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깊고 벅찬 경험만이 사람을 진정으로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돈의 성격

현대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과거에는 사회를 꿰뚫는 규범이 돈 이외에도 있었습니다. 종교가 많은 경우에 그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그로 인한 문제도 많았지만 적어도 그래서 돈이 아닌 가치가 함께 추구되는 세계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왕도 백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 얼마나 지켜졌건 지켜지지 않았던 존재했고 그것은 단순히 권력의 정점에 서는 것과는 결을 달리했습니다. 많은 종교적인 교리는 청빈을 가치로 두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만큼 물질이 아니라 내면의 성장에 집중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현대는 종교가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자본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돈의 성격이나 성질입니다. 이 돈은 내면적인 성장이나 가치, 혹은 윤리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돈은 돈의 가치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윤리적이기도 하고 비윤리적이기도 하며 내면보다는 물질에 더 치우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익형 블로그를 운영한다고 했을 때, 돈을 가져다 주는 글은 단순히 전문적인 글이나 깊이 있는 글이 아닙니다. 다수의 사람이 궁금해할 주제, 그래서 심지어 가십이나 사건, 주식, 금융 그런 글들이 주로 수익형 블로그를 위한 주제로 널리 쓰입니다. 예를 들어 들뢰즈나 데리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철학 블로그를 해서 돈을 벌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그 글을 읽고 그 글이 사람의 내면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거나 더 이롭게 하거나 돕는지 등이 수익을 가져다주는 지표가 아닙니다. 이런 것이 돈이 움직이는 원리입니다. 돈 자체는 투명합니다. 맑지도 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돈이 어떤 윤리나 가치에 관심이 있지도 않습니다. 돈은 그런 것에 무관심합니다. 돈은 철저히 돈의 원리로 움직일 뿐입니다. 마치 줄세우기 정답 사회가 개개인 내면의 취향이나 가치에 관심이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유튜브를 한다로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유튜브는 많은 사람들이 자주 오래도록 보는 유튜브입니다. 그래서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얘기가 수익을 더 많이 가져다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름다운 시골을 소개하는 유튜브보다 도시에서 소매치기한테 당한 얘기가 더 인기가 높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도 아주 심한 검열에 걸리지만 않으면 그 유튜브 자체가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자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유튜브가 관심 있는 것은 그 유튜브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보느냐 입니다. 유튜브가 돈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정답’인 줄세우기가 일어나는 사회와 닮아 있습니다. 유튜브는 심지어 제작자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영상에 담았느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찍는데 제작비가 들고 제작에 한달에서 몇달 씩 걸리는 다큐멘터리는 유튜브에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영상 자체의 작품성은 더 있겠지만 질 뿐 아니라 양으로도 같이 승부하는 유튜브 세계에서 경쟁에 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 유튜브가 잘 되기도 쉽지 않습니다. 관심 있게 볼 사람이 그만큼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유튜브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분야의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덜 가치롭거나 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유튜브의 논리나 줄세우기, ‘성공’도 내면의 가치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가 관심이 있는 것은 돈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돈은 생활의 전반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생활권 자체를 위협받습니다. 안전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어떤 형태로든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종교 단체 등에서는 기부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사업이나 취업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돈을 벌어들이는 방식이나 통로는 다양할 수 있지만 그 통로 자체가 아예 없다면 생활권 자체를 위협받습니다. 돈과의 관계는 계속 맺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것은 돈이 개개인의 취향이나 가치 내면의 울림, 사명 등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돈의 가치로 줄세워진 사회에서의 1등, 정답, 최고가 정말로 자신의 내면의 경험과 가치에 비추어서 동일하게 1등일지는 재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면을 정말로 찬찬히 들여다 볼 경우에 많은 경우에 그것은 비껴날 경우가 많습니다. 위에 말한 것과 반대로 사실 마음이나 그 내면에 차오르는 만족이나 성취감, 기쁨도 반드시 돈에 비례해서 얻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인 이 사회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물건에 가격이 매겨집니다. 그리고 그 가격에 따라서 줄세우기가 시작됩니다. 희소하며 사람들이 많이 원하는 물건은 가격도 높고 그렇지 않은 물건은 낮습니다.

물질과 내면의 만족

그러나 역시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저 매겨진 돈의 가치와 줄세우기가 그 물건을 사용했을 때의 내면의 만족감과 반드시 비례해서 일치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시장은 사람들의 수요와 물건의 공급 사이에서 가격이 매겨지기 때문에 수요가 많은 물건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그 물건을 사용할 때의 만족감이 높은 물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가만히 들여다 보면 다른 작용들이 있습니다.
매연 많은 강남의 아파트에서 사는 것보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산속이나 시골의 집에 사는 것이 사실 몸의 세포들은 더 좋아하고 상쾌한 기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역시 억대 스포츠카라 할지라도 차 안에 하루종일 같혀 있는 경험보다 공기 좋은 어딘가 자연 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자는 편이 몸은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혹은 자전거를 타는 것이 더 상쾌한 기분을 줄 수도 있습니다. 몇십만원 하는 호화로운 식단보다 산채로 만든 적당한 밥이 몸에 더 좋고 비슷하게 신선한 맛있음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무거운 가죽으로 된 명품 백보다 천연 소재로 만든 가벼운 에코백이 더 편안하고 편리한 경험을 선사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이힐에 고급 브랜드 합성 섬유의 옷보다 편안한 단화에 천연 소재로 만든 옷이 몸이 좀더 숨을 잘 쉬고 편안하고 안정된 기분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말했듯이 내면적인 신호도 돈의 가치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돈이 메겨지지 않으면서 더 커다란 내면의 기쁨을 주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쏟아질 것 처럼 밤하늘을 수놓은 밤하늘, 일출과 저녁 노을, 바람 소리, 새 소리, 맑은
공기, 고요함 등도 그중 하나 입니다. 그리고 돈을 좇을 수록, 이런 것들과는 멀어지게 되기도 합니다. 자본이 움직이는 곳이 보통은 저런 곳과 동떨어진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편리함을 갖춘 도시지만 그로 인해서 잃은 가치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돈이 없이도 내면을 너무나 쉽고 든든하게 채워주는 많은 것들과 멀어져가면서 그 공허한 마음이 계속 더, 더, 하면서 돈이나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을 추구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높은 지위

어떤 형태에서든지의 높은 지위를 사람들은 추구합니다. 그래야 생활의 안정과 여유로움이 더 보장이 되는 듯하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내면의 가치와 함께 보면 저 높은 지위도 반드시 내면의 가치를 충족시켜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둘도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명성이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명성을 원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어쩌면 사람이 누구나 타인에게 사랑받기를 추구하는 성질이 내면 깊숙하게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간과하지 않아야 할것은 명성이 정말로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일지에 관한 것입니다. 누군가의 선망이나 내가 잘 모르는 누군가의 평가는 그 자체가 신기루와 유사한 면도 있습니다. 내 가치가 타인에 의해서 결정지워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명예욕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명성의 성취가 내면의 기쁨과 일치한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분명 내면은 그게 아닌 조금은 다른 방향을 가르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사실은 이렇게 까다롭습니다.

마음의 소리 듣기

그러나 이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소리를 듣지 않으면 아무리 세상이 말하는 좋다는 것을 다 가져도 마음이 허전하거나 불행하거나 힘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미는 가치와 마음이 미는 가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소리를 파악하는 동시에, 마음의 소리를 함께 들어나가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와 마음의 소리를 구분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가르쳐주는 순서가 아닌 자신 만의 유일무이한 가치 순서를 그 마음의 소리를 기준으로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자신을 알아가는 작은 여정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가치에 대해서 내 내면의 가치에 비추어 때로는 NO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되지 않는 다면 세상의 가치 속에서 마음이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도하고나 채워지지 못한 마음이 도저히 마음을 두거나 쉴 곳을 찾지 못해서 계속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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